신경림(54영문, 시인)
삐걱이는 강의실 뒷자리에서
이슬 깔린 차가운 돌층계 위에서
처음 우리는 서로 만났다
경상도 전라도
그리고 충청도에서 온 친구들
비와 바람과 먼지 속에서
처음 우리는 손을 잡았다
아우성과 욕설과 주먹질속에서
충무로 사가 그 목조 이층 하숙방
을지로 후미진 골목의 대포집
폐허의 명동
어두운 지하실 다방
강의실에 쩌렁대던
노고수의 서양사 강의
토요일 오후 도서관의 그 정적
책장을 넘기면
은은한 전차 소리
그해 겨울 나는 문경을 지났다
약방에 들러 전화를 건다
달려나온 친구
분필가루 허연 커다란 손
P는 강원도 어느 산읍에서
생선가게를 한다더라
K는 충청도 산골에서 정미소를 하고
이제 우리는 모두 헤어져
공장에 광산에 또는 먼 나라에서
한밤중에 일어나 손을 펴 본다
우리의 피속을 흐르는 것을 본다.
솟구쳐 오는 아우성 소리
어둠속에 엉겨드는 그것들을 본다
·
송진 냄새 짙은 강의실 뒷자리에서
꽃잎이 지는 잔디 위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
이 한밤중에
제주도 강원도 경기도에서
비와 바람과 먼지 속에서
향수와 아쉬움과 보람속에서
(동대신문, 1974. 5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