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총동창회
 
 
 
‘2024자랑스러운 동국인 대상’ 수상자 김성재 회장(정치학과 58학번) 인터뷰
  • 최고관리자 | 2025.01.21 11:40 | 조회 5477
    ‘2024자랑스러운 동국인 대상’ 수상자 김성재 회장(정치학과 58학번) 인터뷰

    “베푸니까 돌아오더라”...4.19 유공자로서 해야 할 몫 다해 동국인 대상 수상 
    “모교와 총동창회에 더 많은 기여 해달라는 뜻으로 알겠다”




    김성재 아세아자산관리(주) 대표이사 회장(정치과58)은 4.19 혁명에 직접 참가한 4.19유공자다. 그의 명함에는 ‘4.19혁명 공로자회 건국포장 수훈자(보훈단체)’라는 기록이 찍혀있다. 그만큼 4.19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강하다. 

    김 회장은 80대 중반이지만 노인티가 나지 않은 고운 얼굴이다. 영화배우 뺨치는 외모다. 그래서 젊었을 적 한때 충무로 영화가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이러저러한 이야기가 이어진 뒤, 지난해 11월 27일 열린 ‘동국인의 밤’에서 ‘2024 자랑스러운 동국인 대상’을 받은 소감부터 들었다. 

    “1961년 정치과 4학년 때 동국대 정두석 총장배 쟁탈 전국웅변대회에서 총장공로상을 받은 이래 1924년 자랑스런 동국인 대상을 받았습니다. 63년만에 동국인으로서 두 번째 받은 상이다 보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상은 앞으로 모교와 총동창회에 더 많은 기여를 해달라는 뜻으로 알고 보다 애정을 갖고 모교와 총동창회에 관심을 갖겠습니다”

    김 회장은 6년 전 ‘동국인의 밤’에서 참석자 상품권 추첨이 있을 때, TV 세트를 받았다. 이때 수상 소감으로 앞으로 매년 동국인의 밤에 TV 수상기 2대씩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4.19혁명 시위 당시 상황을 말씀해주시죠.

    “아, 우리 대학이 대단했지요. 고대가 4.18로 유명하지만 그건 깡패들한테 습격을 받아서 유명했을 뿐, 우리 대학의 4.19 활동에 비하면 미미해요. 고대는 4.19 유공자가 43명(생존 16명)인데 반해 우리 동국대학은 46명(생존 20명)으로 전국 최고입니다”

    4.19 당시 동국대는 전교생의 대부분이랄 수 있는 2000명이 1, 2진으로 나뉘어 서울시청-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광화문-경무대(오늘의 청와대)로 진출했다.

    “4월 19일 오전 10시경 1진은 모교를 나와 을지로-관철동으로 진출했고, 20분 후 2진은 퇴계로-신세계백화점 방향으로 진출했지요. 우리는 모두 국회의사당에서 만났는데, 김칠봉(법과)이 갑자기 “경무대로 가자!”하고 외치는 거예요. 그래서 동국대 시위대가 최선두에 서서 경무대로 진출했어요. 완전무장한 경찰이 광화문 앞, 효자동에 배치돼 접근하는 시위대에 발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수도 공사를 하기 위해 도로에 갖다 놓은 수도관을 방패삼아 밀고 올라갔죠. 그런데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고, 노희두 군이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어요. 4.19혁명 첫 희생자가 난 것이지요”
     
    그때의 상황을 어제의 일처럼 기억하는 김 회장은 자유당 정부가 붕괴되자 동국대가 종로경찰서를 접수, 치안 유지에 나설 때 함께 참여해 거리 청소를 하고, 교통 안내에 나섰다. 4.19혁명 대오의 일원으로 현장을 지킨 그는 1961년 정치학과 회장으로도 활약했다. 김 회장은 이런 공로로 2018년 4.19혁명공로자회 대상, 2022년 4.19혁명기념회관에서 열린 4.19혁명공로자회 제26차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명예회장에 추대됐다. 지난해엔 8.15기념 민족공훈 시상식에서 국가보훈공훈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4.19 관련한 행사나 학술세미나 등에 그는 언제나 봉사와 배려에 힘썼다. 

    “혁명의 과실을 따먹기보다 혁명의 정신을 살리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나선 길입니다”

    물론 이렇게 배려와 헌신, 성금 기탁은 성공한 기업인의 길을 걸어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4.19세대로서는 성공한 기업인으로 널리 회자된다. 사업을 벌여 큰 돈을 벌었다고 해도 기념 행사의 스폰서로 나서거나 재정 지원을 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는 주저없이 나선다. 

    “내 일생을 관통하는 기본 정신은 4.19의 뜨거운 정신이 심장에 박동 친다는 것입니다. 그 뜻을 결코 잊거나 외면할 수가 없지요”

    김 회장은 경주 대부호의 후손이었다. 경주중고등학교 재학 시절,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고, 대학에 진학해서도 넉넉하게 살았다. 경주최씨가 1만석을 했다면 김 회장 가대는 8000석을 한 재력가로 소문나 있었다. 

    그는 대학 졸업후 서울에 남아 취직자리를 찾아 배회하던 중 어느날 충무로에서 배우 모집 광고를 보았다. 외모에 자신이 있었던 그는 배우 모집에 응시해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5인 중 한 명으로 선발됐다. TV도 나오지 않은 시절, 영화 단역으로도 출연했다. 

    그러나 주연급 이외는 배고프다는 것을 알고 충무로를 떠나 쌍룡양회 대리점을 운영했다. 그후 한남고속 포항영업소장, 대농 부장을 거쳐 1981년 신아자동화시스템(주)을 창업해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이때 전국 하수종말처리장 자동화시스템 설치 작업에 참여해 많은 돈을 벌었다. 전국적인 공사를 신아자동화시스템이 거의 독점적으로 시행했던 것이다.    

    -경쟁이 심한데 사업권을 따낸 비결은 무엇입니까.

    “일단 사업 목표가 주어지면 거래처나 관공서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찾아가죠. 설계 도면이나 사업계획안, 또는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가지고 가서 설득을 합니다. 그 바탕은 성실성과 친화력이지요. 이를 바탕으로 접근해갈 때 처음에는 거부 의사를 보이다가도 진지한 열정과 끈질긴 설득에 감동을 받고 공사 승인을 해줍니다”

    당시만 해도 중소기업 육성법에 따라 수의계약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설사 공개입찰이라고 해도 공사를 따낼 수 있는 철두철미한 준비와 설득력있는 설명으로 목표를 달성했을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우리 가대를 설명하자면, 증조부가 8000석을 했고, 할아버지 6형제가 각각 1200석의 농지를 상속받았지요. 그리고 제 아버지가 그것을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는데, 해방 직후 토지분배 정책에 따라 소작인에게 2분의 1을 빼앗겼습니다. 그후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고, 가대가 몰락하였으나 내가 사업을 일으켰지요”

    김 회장은 경주시내 한 복판 알짜배기 땅에 농산물공판장을 차렸다. 이외에도 서울과 경주, 대구에 상당한 부동산을 갖고 있고,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아들에게 경영권을 맡기고 있다. 재산 상속도 해주었다. 

    -인생관을 말씀하신다면?

    “첫째, 말에 대한 책임이죠. 나는 스스로 말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실천합니다. 그것이 신뢰로 돌아오고, 사업을 통해서도 그 덕을 봅니다. 다음으로 ‘베풀자’는 주의죠. 베푸니까 돌아오더라는 철리를 배웠습니다”

    인터뷰한 이날도 김 회장은 굳이 저녁식사를 하자면서 동창회 구성원들을 모두 식당으로 안내했다. 김 회장의 좌우명은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산다”는 것. 100을 가졌다면 70은 갖더라도 30은 조건없이 남에게 주라는 것이다.

    -모교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솔직히 나는 5대째 내려오는 교회(경주 제일교회) 가족입니다. 그래서 불교 종립학교인 모교와는 알게 모르게 거리가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이 먹고, 이런 과분한 상까지 받으니 모교와 총동창회에 애정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모교와 총동창회 일이라면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모교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옛 명예를 되찾아달라는 것입니다.”

    -총동창회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총동창회가 충무로 시대로 접어들어 새롭게 출발한 만큼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 동문 구성원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문호를 개방해주세요”

    김 회장은 부인 송지혜(84) 여사와의 사이에 장남 김강현, 2남 김승현을 두고 있다. 김 회장이 부인 송 여사를 만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라고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당시 김 회장 누나가 경주 월성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중간고사·기말고사 때는 반장인 송지혜 어린이를 불러들여 채점하도록 했다. 이때 예쁜 송 어린이를 보고 마음에 두었다가 청년기에 다시 만나 결혼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김 회장은 가정적으로도 대단히 행복해 보인다.

    이계홍<총동창회보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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