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총동창회
 
 
 
류정우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 회장
  • 최고관리자 | 2020.12.24 12:35 | 조회 1526




     유관순 - “나라의 완전한 독립만이 자유 보장한다

     

    서대문 형무소 유관순 열사 옥사(獄舍) 자리 동상 세우겠다

    1등급 대한민국 서훈 받아내

    17세 나이 독립운동정신 깊이 새겨야

    국운 융성에 맞춰 극일(克日) 해야

     

     

    사단법인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 회장 류정우(柳汀宇·58년 법학과) 동문은 80대로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한 모습이다. 서울의 한 복판 중구 삼일대로 363번지 장교빌딩 15층에 자리 잡은 사무실을 찾자 왕성한 활동력을 보이는 모습의 류 회장이 필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본래는 1939년생이요. 우리 나이로 82세지요. 그러나 호적에 한 해 늦게 등재되어서 1940년생이 되었는데, 당시 풍조가 부모님들이 한두 해 늦게 호적에 올리다보니 면사무소 직원도 세밀하게 따지지 않고 당일자로 호적에 올리는 바람에 한 살 늦게 등재되는 일이 흔했지요.”

     

    고령임에도 표현력이 정확하고 기억력이 또렷하다. 꼿꿋한 자세 또한 노인의 풍모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현업 일선에서 근무하는 자세 때문일 것이다.

     

    류 회장이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장이 된 것은 유관순 열사와 같은 고흥류씨 종친이란 이유가 크다. 류 회장은 8년간 고흥류씨 중앙종친회장을 지내며 크고 작은 종친회 일을 보아왔는데, 유관순 열사 관련 행사 주재는 물론 유업을 잇는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유관순 열사와는 같은 석()자 돌림의 형제간 항렬이지요. 우리에게 보통명사화된 유관순 누나는 실제로 나의 서른여덟살 위 누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흥류씨 27세손입니다.”

     

    전임 회장 이혜훈 전 의원이 류 회장이 고흥류씨 종친회장 자격으로 유관순 열사 행사는 물론 유업을 잇는 사업에 나서다 보니 어느 날 그에게 후임 회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한두 번 고사했지만 후임 회장직을 맡기다시피 했다.

    그래서 20171212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동안 유관순열사 기념사업회는 국방부 차관이자 원호처장(보훈처)을 지낸 류근창 동문(혜화전문), 곽정현 전 국회의원 등이 맡아왔다. 류근창·곽정현 전 회장은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충청향우회장 출신이라는 인연으로 회장직을 맡았다면, 류정우 회장은 같은 고흥류씨 인연으로 맡게 되었으며, 종친이 회장이 된 것은 류 회장이 첫 케이스다.

     

    그런데 유관순이라는 유씨와 류 회장의 류씨가 다르게 표기된 것은 버들 자를 70년대 이후 류씨로 사용해왔기 때문. 유관순열사 기념사업회는 성을 류씨로 사용하기 전의 명칭이어서 보훈처에 등록된 대로 사용하고 있다.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역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8.15.) 때보다 길다. 이 사업회는 해방 직후 미군정 시기인 1947년 유관순 열사의 항일 구국 독립정신을 추앙하고 애국정신을 계승 선양함을 목적으로 발족되었다.

     

    당시 조병옥 박사가 명예회장을 맡고, 서재필 이승만 김구 최현배 정인보 선생 등 민족 지도자들이 고문직을 맡았으며, 오천석 문교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고, 각 시도지사가 위원직을 맡은 범국민 기구로 출범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기쁨을 유관순 열사의 구국항쟁 정신으로 결합시킨 동력으로 삼기 위해 거족적으로 기념사업을 벌인 것이다. 이때 유관순 열사 영화도 찍었다. 기념사업회는 이후 국가보훈처에 사단법인 단체로 등록됐다.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는 지금까지 각종 기념 건축물과 시설, 그리고 추모 사업을 벌여왔다.

     

    그러나 국가상훈법에 김구, 이승만, 안창호, 안중근 등 30명이 포함된 건국훈장1등급 대한민국장과 신채호, 신돌석 등 93명이 들어간 2등급 대통령장과 비교해 823명 중 한 사람인 유관순열사가 3등급 독립장을 추서받아 류 회장이 취임하면서 1등급 대한민국장 서훈을 받아냈다. 이로써 1등급은 31명이 되었으며 국내 여성으로는 유관순 열사가 유일하다.

     

    유관순 열사가 아우내 만세운동은 물론 투옥 중에도 일본의 재판권을 거부하고, 독립투쟁을 벌이다 고문 끝에 사망함으로써 3.1독립운동의 꽃이 된 것은 어떤 무엇보다 숭고하고 순결한 불굴의 정신이 아닐 수 없지요. 그런데 서훈등급이 3등급이라는 것은 열사의 활동과 정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라 판단하고 여론을 환기시킨 끝에 마침내 1등급으로 받아낸 것입니다.“

    이 결과 청소년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일문일답]

     

    -유관순 열사는 우리나라 초등학생들까지 추앙하는 인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 열사의 의거활동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관념적으로 아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부터 소개해주시지요.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 날짜는 1920928일입니다. 18세 때죠. 어린 처녀가 고문 끝에 방광 파열로 감옥에서 순국하셨습니다. 그런데 일제 당국이 시신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고문으로 온 몸이 피멍이 들었으니 당장 내주기가 그들도 일말의 양심이 있었겠지요. 결국 교섭 끝에 14일 후인 1012일 이화학당에 시신이 인계되었어요. 유 열사는 1년 반의 옥중 생활 끝에 죽음으로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것이지요.”

     

    유 열사의 유해는 이화학당에 인도되어 스승과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014일 이화학당 앞 정동교회로 옮겨져 김종우 목사 집례로 장례미사를 치르고, 당일 경찰의 감시 속에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5년 후인 1935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전환하면서 공동묘지의 모든 묘를 1936430일까지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명합니다. 당시 한성시(서울시) 보건과에서는 연고자들에게 묘 이장비를 지급했는데 5만기 중 22000기는 연고자가 나타나 이장비를 받고 묘를 이장했으나 나머지 28000기는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일부러 널리 고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유관순 열사 묘도 무연고 묘가 되어서 한성부 위생과에서 무연고묘의 유골을 수거하여 화장시켜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하고 19361229일 무연고합장위령비가 세워졌어요.”

     

    이처럼 유 열사의 묘가 무연고 묘가 된 것은 누구 하나 돌볼 사람이 없는 비극적인 가족사 때문이었다. 부모가 일본 헌병의 총에 맞아 죽고, 오빠 역시 감옥에 있었으며, 어린 형제들은 유리걸식을 하고, 친척들은 감시받고 살았다. 결국 이렇게 해서 유관순 열사의 묘가 1936년 이태원 공동묘지 이전 과정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후 유 열사의 고혼(孤魂)이라도 편히 쉬게 하고자 198910월 천안시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招魂墓)를 봉안하게 되었습니다.”

     

    망우리 공동묘지는 1933년 개설하여 1973년 폐장되기까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4.19혁명 등 격동의 근현대사를 품은 공간이다. 죽산 조봉암과 위창 오세창 등 독립운동가를 비롯해 만해 한용운과 소파 방정환, 시인 박인환, 화가 이중섭, 소설가 계용묵 등이 이곳에 잠들어있다.

     

    류 회장은 3.1여성동지회, 이화여고총동창회, 백석대 유관순연구소, 중량구청과 함께 합장묘역을 성역화시키기 위한 사업을 펴오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 201897일 유관순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를 세웠으며 20201026일 중랑구청에서 유관순열사 합장묘역으로 새롭게 단장시켜 놓았다.

     

    -유관순열사 기념사횡의 주요 사업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앞으로 유관순 열사 동상을 북한에도 세울 계획입니다. 북한은 3.1독립선언을 한 손병희 선생이나 임시정부 김구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을 북한 인민에게 알리고 있지 않지만 유관순 열사만은 우리와 똑같이 북한 고등중 교과서에 싣고 있습니다. 그들이 유관순 열사에 대해 널리 알리고 있는 것은 유관순 열사의 순결한 독립투쟁 정신을 높이 샀기 때문이겠지요.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 남북미 정상회담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북한에 남북 공동으로 유관순 열사 동상을 세울 계획을 세웠습니다. 통일부 교류 협력국에 건의한 뒤 사업을 추진하려 했으나 지금 남북 관계가 교착상태가 되면서 지연되고 있습니다. 남북 모두 공통적으로 이의없이 추앙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시행하려고 합니다.”

     

    다음으로 필생의 사업으로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 서대문 감옥 현장에 유관순 열사의 동상을 세우는 일이다. 3.1운동 때 체포되어 이듬해인 1920928일 오전 8시 서대문감옥 여자 8호 감방에서 순국한 만 18세 소녀의 항일 구국정신을 순국 현장에서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산 교육장이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 감옥 수감 중에도 독립만세를 외치며 옥중 동료들을 격려했으며, 그때마다 매질과 고문을 당했습니다. 인명을 살상하지 않은 시위에서 5년형을 선고받은 예도 없었지만, 옥중에서까지 굽힘없이 나라의 독립을 외쳤습니다. 그 정신을 순국 현장에서 확인하는 일은 어떤 일보다 후세들에게 우선시되는 산교육이 될 것입니다.”

     

    순국 100주년인 올해 동상을 건립하려고 하였으나 제반 여건이 따르지 않고, 코로나 19까지 겹쳐 내년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고 아쉬워한다.

     

    세 번째로는 유관순 열사 소재의 영화를 시공간과 국경을 초월해 애국정신을 담는 영화로 만들어보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수익이 창출되면 유관순 기념회관을 짓겠다는 것이다.

     

    -한때 유관순 열사 영정을 5만원권 지폐에 넣기로 국민청원 운동을 하기도 했었지요?

     

    노무현 대통령 시절입니다만,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도 화폐에 쓰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최종 단계에서 신사임당으로 바뀐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일간의 문제, 나이어린 소녀를 화폐 사진으로 쓰느냐는 가부장적인 보수적 태도들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신사임당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현모양처 모델이 국가 상징 화폐 사진으로 사용되는 것은 지금도 고개가 갸웃해집니다. 민족의 기개를 생각하면 임펙트 있는 인물이 등재되어야지요. 순결하고 숭고한 여성 인물로는 유관순 열사 이상 누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유관순 정신은 무엇입니까.

     

    17세의 나이로 독립운동을 시작하면서 자유는 생명과 같다고 한 말씀은 놀라운 사상 아닙니까. ‘나라의 완전한 독립만이 자유를 보장한다는 말은 장자크 루소 이론과 같지요.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간판으로 올렸습니다만,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이라고 한 말씀은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합니다.”

     

    한편 유관순 열사의 운동 시기를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이화학당 재학 중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 등과 함께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이화학당 결사대'를 조직하여 31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만류하는 프라이 교장선생님 등 교사들을 뿌리치고 학교 담을 넘어 탑골공원에 진출해 만세를 부르고 돌아왔다. 이후 학생단 시위를 주도하고, 35일 남대문 앞에서 벌어진 학생단 시위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날 5인결사대는 경무총감부 사찰계에 체포되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석방을 요구하자 일단 풀려났으나 모든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진 뒤였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을 함께 다니던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충청남도 병천으로 내려갔다.

     

    고향에서 유관순의 활동은 더 활발했다. 일제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머리에 수건을 쓰는 등 변복으로 병천 목천 천안 안성 청주 등지의 교회학교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규합, 만세운동을 펼쳤다.

     

    태극기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군중들을 이끌었다. 이때 일본 헌병들이 들이닥쳐 시위 군중에게 무차별 발포했다. 유관순은 또다시 체포되었다.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재가 일본 헌병의 총을 맞고 현장에서 죽음을 당했다. 오빠 유우석도 체포되었다. 공주 영명학교에 다니던 오빠 유우석은 공주 감옥에 수감되어 유관순을 감옥에서 만나자 비통한 한마디를 남겼다.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엄마도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너도 여기 왔구나. 부모님의 죽음을 헛되이 말자.”

     

    많은 사람들은 유관순 열사에게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의 가족사가 이렇게 비참하게 부숴지는 과정을 잘 알지 못한다. 나머지 어린 형제들은 이후 유리걸식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몇 년 전 아베 정권 이후 일본의 극우화가 극심해지고, 국내에서도 친일파들이 발호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런 현상을 볼 때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 투옥 당시 독하기로 소문난 야마사끼 일본의 간수부장(교도관)에게 고문을 당했고, 복부를 밟혀 방광 파열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 열사와 그 가족이 개인적 영달을 위해 이런 험로를 갔겠습니까. ’침략자가 어떻게 주인을 재판하려 하나‘, ’내가 내 땅을 찾겠다는데 그게 무슨 죄가 되느냐고 어린 소녀가 준엄하게 일제를 꾸짖는 것을 보고 생각 있는 백성이라면 각성해야지요. 그리고 우리는 일본보다 못하면 안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의 국운이 융성해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 자신의 위치를 비굴하게 자학하며 살았지만, 행정처리 능력은 세계 최고이며 한반도 땅에서는 게르마늄이 많아 한국산 배추 마늘 고추 양파가 세계 최고의 식품 재료가 되어 코로나 19도 거뜬히 이겨내고 있다고 말한다.

     

    작은 울타리에 스스로 가두지 말고 대양과 대륙을 향해 웅비할 수 있는 기개를 펼쳐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래야 극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류 회장은 아산재단의 운영부장으로 재직 중 송파구 풍납동의 현대아산병원 건설을 총괄, 오늘의 전국 4대 메이저 병원의 기틀을 마련했다.

     

    동국대 58학번 동기 중에는 경제과의 김영구(전 민주자유당 사무총장 및 원내총무), 정치과의 조국형, 김진철 동문 등이 있었다며, 동창회가 동문의 소통 창구로서 역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이계홍(65 국문학과·,동창회보 홍보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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